완치의 시대를 맞이한 중장년 혈우병 환우의 삶

  bravomylife​ /  2025.05.09​​

회복, 재설계, 그리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자

혈우병의 치료가 실질적인 완치의 단계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많은 환우들에게 새로운 삶을 다시 설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중장년기에 접어든 환우들에게 이 변화는 단순한 의학적 개선이 아닌, 삶의 근본적 전환을 요구하는 하나의 거대한 전환점이 되고 있다. 이미 수십 년간의 반복적인 출혈과 관절 손상, 만성 통증으로 인해 장애를 안고 살아온 이들이라면, ‘이제는 고통이 없는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 앞에서 기쁨과 동시에 혼란을 느끼게 된다. 그동안 일상화된 제약 속에서 스스로를 제한하며 살아왔던 이들에게, 완치라는 현실은 곧 새로운 자기 정의를 요구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먼저 다뤄야 할 변화는 정신적인 영역이다. 중장년 환우들은 긴 시간 동안 자신의 몸을 '아픈 몸'으로 받아들이며 살아왔다. 출혈의 두려움, 사회적 낙인, 반복되는 병원 방문과 재활 치료는 일상의 일부였고, 많은 이들이 질병에 맞춰 자신의 삶을 설계하고 제약해왔다. 그런데 이제 그 전제 자체가 무너지고 있다. 질병은 점점 통제 가능해지고 있으며, 더 나아가 사라질 수도 있는 상태가 되었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존재적 질문 앞에 다시 서야 한다. 이는 단지 치료의 성과를 받아들이는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재구성하고 삶의 목표와 방향을 다시 설정하는 문제이다.

이전까지는 '하지 못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졌던 삶이었다면, 이제는 '할 수 있는 것'으로 시야를 전환해야 한다. 이는 곧 사고방식의 변화이며, 절망에 익숙해진 내면을 희망으로 전환하는 의지적 훈련이기도 하다. 과거에는 자립을 포기하거나 회피했던 이들이라면, 이제는 자신이 다시 사회 속에서 어떤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지,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의미 있는 기여를 할 수 있을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자녀에게, 배우자에게, 동료 환우에게 어떤 존재로 살아갈 것인지를 새롭게 정의해야 하며, 이를 통해 자기 존중감과 삶의 방향성을 회복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육체적인 면에서도 중장년 환우들에게 주어진 기회는 실로 크다. 오랜 세월 동안 반복된 출혈로 인해 관절의 변형과 근육 약화, 보행의 어려움을 겪어온 이들에게, 치료의 안정성이 확보된 지금은 ‘신체 회복’을 위한 전략적 시점이다. 이는 단지 물리치료나 재활치료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더 나은 기능 회복을 위해 정형외과적 수술이 필요한 경우, 이전에는 출혈 위험 때문에 미뤄졌던 수술들도 이제는 충분히 계획 가능하다. 인공관절 치환술, 관절 정비 수술, 근육과 힘줄의 재건 등은 과거에는 멀게만 느껴졌던 선택지였지만, 지금은 회복을 위한 적극적 수단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수술적 접근과 병행하여 재활운동 역시 반드시 체계적으로 병행되어야 한다. 단순히 관절을 사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근육과 인대의 안정성을 회복하고, 기능적 움직임을 통해 독립적 생활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수영, 재활 필라테스, 균형 운동, 심폐 기능 향상을 위한 걷기 훈련 등은 신체 기능의 회복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안정과 자존감 회복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 치료 안정화 이후에도 움직임을 회피하려는 습관이 남아 있을 수 있으므로, 이를 극복하는 것은 단지 근육을 쓰는 일이 아니라, 새로운 삶에 대한 신뢰를 쌓는 훈련이라 할 수 있다.

중장년 환우들의 경우, 젊은 시절 겪은 교육의 단절, 직업 선택의 제약, 사회적 소외감이 삶의 패턴을 수동적으로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완치 시대에 접어든 지금은 새로운 사회적 역할을 준비해야 할 시점이다. 단순한 경제 활동의 재개를 넘어, 환우회 활동, 교육 및 상담 자원봉사, 지역 사회 건강증진 프로그램 참여 등은 삶의 의미를 회복하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다. 자기 경험을 나누고 후배 환우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일은, 고통을 겪은 자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사역이자 사명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전환은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삶의 구조와 정체성을 송두리째 바꾸는 일이기에, 전문적인 심리상담이나 코칭, 사회복지 프로그램의 연계도 필요하다. 병원에서 치료를 마친 이후, 지역사회로의 복귀를 준비하는 전환기적 돌봄이 체계화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환자들은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고, 단계적으로 사회적 역량을 회복해 나갈 수 있다. 삶의 주도권을 다시 되찾는 일은 단지 의지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며, 공동체의 응원과 체계적인 지원 구조가 함께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혈우병으로 인해 굳어졌던 몸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고, 굳어졌던 사고가 다시 열리기 시작할 때, 비로소 환자는 ‘삶의 패러다임’을 바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고통 중심의 생존이 아닌, 의미 중심의 삶으로 이동해야 할 때이다. 병으로 인해 갇혀 있던 시간은 끝났고, 새로운 가능성의 문이 열리고 있다. 그 문을 여는 열쇠는 변화에 대한 의지, 회복에 대한 기대, 그리고 자기 자신을 향한 믿음이다. 중장년 혈우병 환우들은 지금, 인생의 두 번째 봄을 준비할 수 있는 가장 결정적인 시점에 서 있다. 그리고 이 변화의 여정은, 그들만의 것이 아닌, 수많은 이들에게 희망의 불씨를 전하는 아름다운 이야기로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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